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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니처 8코스 가격은 1인 23만원, 8페어링 코스는 17.5만원, 1인 40.5만원이라는 무시무시한 가격을 경험해 보기로 한다. 

 

 

첫 번째는 아뮤즈부쉬. 왼쪽부터 순서대로 달걀찜, 새조개, 홍새우, 미니부케, 사과셔벗, 가운데는 트러플 육회가 올라간 브리오슈 토스트. 이렇게 시계 방향으로 먹는다. 

 

맛은 눈에서 느껴지는 것과 거의 일치한다. 감태가 들어간 달걀찜은 촉촉하니 부드럽고 은은한 감태향도 난다. 새조개는  지금 철이 아닌데 어떻게 구해서 조리한 건지는 모르지만(국산인지 수입산인지 정보가 없다. 물어볼걸 그랬나..) 적당히 새콤한 폰즈소스에 통통한 새조개살의 씹힘이 좋고, 은은한 단맛도 있다.

 

홍새우는 보나마나 남미산을 썼을 것이고(아르헨티나 붉은새우) 쌀가루 튀김 반죽이 베이스라 바삭하다. 그 옆에 미니부케는 앙증맞은 모양새로 미니쿠스, 꽁태치즈에 오랜지 드레싱이 뿌려졌다. 아삭아삭 줄기 씹는 식감이 좋고, 중간중간 느껴지는 치즈의 고소함이 힌트 역할을 한다. 

 

 

8코스 페어링의 첫 잔은 돔페리뇽 2008. 현재 시중에 풀리고 있는 샴페인 하면 2008이 역대급 빈티지라 가격도 비싸고 구하기도 어려운데 돔페리뇽 2008의 경우 씨가 말라서 지인 분양이나 백화점, 소형 점포에서 어쩌다 나온 게 아니면 구매가 쉽지 않다. 

 

 

이 녀석은 두 번째 시음인데 칠링과 브리딩이 완벽했다.(사실 우리가 받은 잔이 거의 막잔이었으니) 잘 익은 사과, 살구, 볶은 아몬드, 브리오슈, 자글자글한 기포에 지속력도 뛰어나다. 산도 적당하며 균형감이 너무 좋았다. 

 

 

아뮤즈 부쉬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셔벗은 다음 코스를 위해 이제야 입가심을 한다. 

 

 

두 번째 페어링 코스는 빌리쉐퍼 그라허 리즐링 트로켄 2014. 

 

때마침 캐비어가 나와서 함께 즐겨보기로 한다. 돔페의 임팩트가 채 가시기 전에 맞이한 리즐링도 상당히 농익었다. 은은한 페트롤향, 무화과, 오크 등이 적당히 버무려지면서 향과 맛이 풍부하다. 산도도 딱 균형감을 이루고, 약간 갈변한 사과 또는 사과잼 뉘앙스가 풍기며, 이후엔 달고나나 카라멜 같은 잔당감으로 마무리된다. 과실 집중도가 뛰어났고, 페트롤과 미네랄의 미묘함이 어우러진 완숙미도 좋았다. 

 

 

케비어는 고급스러운 자개 스푼이 제공된다. 쇠숟가락으로 떠먹으면 예민한 케비어의 맛이 가버리기 때문. 그 아래는 가리비 관자와 다시마 육수 + 간장으로 만든 젤리가 간을 맞춘다. 나쁘지 않은 전체요리다. 

 

 

3번째 페어링 코스는 필립 반델 레뜨왈 비에이비뉴 2011. 프랑스 쥐라 마을의 화이트 와인으로 샤도네이와 사바냥이 블랜딩됐다. 오크 숙성이 엄청난 녀석이다. 거의 꼬냑을 마시는 듯 양주향에 흠뻑 취한다. 진한 나무 냄새, 오크주스, 알코올이 강하게 느껴지며, 그와 동시에 카라멜, 농후한 버터, 스카치 캔디, 심지어 마아가린과 발효취 등이 차례대로 혀를 때린다. 과실도 엄청 진하고 향도 강하다. 

 

과실은 잘 익은 황도 복숭아, 살구, 바나나 같은 열대과실이 주도하며, 오크번(태운냄새), 구운 견과류, 미네랄리티까지 복합적으로 다가온다. 이런 점으로 인해 산도가 다소 높아도 균형감이 좋은데 아무래도 캐릭터가 쎈 아이다보니 호불호는 갈릴듯. 나는 한잔은 아주 맛있게 마셨지만, 두잔 마시라면 부담스러울지도.. 

 

 

어쨌든 쥐라 마을의 화이트 와인은 아스파라거스 요리와 합을 맞추는데... 와인의 캐릭터가 강해서 이 요리와의 궁합은 좀 갸우뚱했다. 아스파라거스는 강원도 산이고, 제주도 화이트 아스파라거스도 숨어 있다. 어두운 부분은 그 유명한 모렐 버섯이고 송어알이 곁들여졌다. 음식이 전반적으로 깔끔하고 삼삼하면서 모렐 버섯 향이 힌트 역할을 하니 괜찮았던 메뉴다. 

 

 

4번째 페어링 코스는 레 베르트랑 플뢰리 꾸 드 폴리 2020. 프랑스 보졸레 지역에서 만든 갸메 100% 와인이다. 과실보단 흙냄새 등 떼루아적 뉘앙스가 강하게 풍기는데 아직은 덜 열려서 그런듯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허브향을 필두로 장미향이 나며, 딸기, 라즈베리, 그런데 그 안에서 묘하게 고소한 풍미가 나는데 땅콩 향이다. 여기에 쿰쿰한 볏짚향, 시골향기가 섞이면서 뭐랄까 아빠냄새? 홀애비 냄새, 심지어 발꼬랑내 같은 발효취가 올라온다. 막판에 이르러서는 딸기 쮸쮸바 맛으로 마무리. ^^ 

 

상당히 여리여리하고 섬세하며 복합적인 아이지만, 요건 와인 좀 마셔본 분들이 좋아할 듯 싶다. 

 

 

이 여리여리한 와인과 합을 맞춘 음식은 정식당의 시그니처라 할 수 있는 참치 김밥. 단품으로 주문하면 2만원 초반쯤인가 할 텐데.. (겨우 이게?) 

 

 

또 생각날 정도로 맛있었던 김밥. 특히, 저 송로버섯 향을 머금은 밥알과 그것을 감싼 김튀각의 바삭함은 상당한 임팩트를 주기에 모자름이 없었다. 

 

 

김밥엔 큼지막한 참다랑어 속살(아까미)이 함께 제공된다. 참치를 김밥 위에 올리고 한입 크게 베어물면 세상 행복한 맛. 이러니 2만원이 넘어도 추가로 시켜먹으려 하지. 

 

 

5번째 페어링 코스는 마우로 몰리노 바롤로 2016이다. 물론 네비올로 100%인데 이태리 피에몬테 지방의 바롤로, 바르바레스코는 최근 2016년 만큼 역대급 빈티지도 없었을 것이다. 바롤로가 2016년이면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사서 쟁기는게 이득인 것. 

 

어쨌든 초반에는 장미꽃과 붉은 꽃향이 피어오르면서 시가박스, 흙냄새, 타르 캐릭터가 선명히 난다. 아~ 이런 냄새 너무 좋아.. ㅎㅎ 그러나 맛은 향과 따로 노는데 섬세하고 부드러울 것 같은 느낌에서 뒤통수 한방 딱 때리는 느낌? 

 

바롤로의 특징이 여기서 나오는데 강렬하고 거친 타닌, 떫은맛, 매콤한 스파이시, 그것도 태양초 고추의 알싸함이 올라오는데 아직 환원된 상태인 듯하다. 그래서 3분동안 강렬하게 스월링을 해주었더니 알싸한 환원취는 날아가면서 슬슬 제비꽃 향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제비꽃향은 바이올렛 꽃향과 동일시해도 무리는 없고.. 실제 제비꽃이 있지만 보라색 계열의 꽃향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대게 이런 와인에서 이런 향이 느껴지기 시작한다면 그때부턴 와인이 열리기 시작했다고 봐도 된다. 주로 딸기와 크렌베리가 느껴지며 피니시가 10초 가까지 지속되는 긴 여운. 이날 8페어링 코스 중 단연 1위였다. 

 

 

바롤로와 함께한 음식은 로얄비빔밥.(작명은 좀 촌스럽다.) 보다시피 트러플 버섯이 가득 올라갔다. 

 

 

물론, 호주산이라(유럽산보단 상대적으로 저렴) 가능한 양이지 않을까 싶은데 이것도 향이 그리 약하지는 않고, 밥은 보리밥에 푸아그라와 소고기를 넣고 볶았단다. 뭐 술술 넘어간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건 그냥 자본주의 맛이다. 기름진 대지가 안겨주는 그런 맛. 단품으로 어떻게 좀 안 되나. 양푼이에 가득 비벼 먹었으면 한이 없겠다 싶은 그런 맛.

 

먹다가 느끼함이 올라오면 타닌의 강렬함과 장미향이 어우러진 바롤로로 입가심. 생각만 해도 궁합이 딱이다! 바롤로와 이 녀석의 궁합은 괜찮았다. 

 

 

6번째 페어링 코스는 배 와인이다. 배로 즙을 내어 만든 술인데 이게 또 우리가 아는 그런 배가 아니라 서양배겠지. 서양배도 서양배 나름인데(이것도 품종이 여럿이라) 잘 익은 서양배는 참 맛있다지.(식감이 우리배와 달리 아삭하진 않고 복숭아 깨문 식감이지만) 

 

 

와인이 아니어서 좀 섭섭했지만, 옥돔 스테이크와 한잔 하기엔 나쁘지 않은 궁합이었다. 제주산 옥돔은 숯불향을 입혀 그릴에 구워냈는데 아랫쪽에 깔린 건 킹크랩과 마 장아찌다. 소스는 버터와 커리를 조합한 베르블랑 소스. 조리 상태, 서빙 온도, 소스와의 궁합. 뭐 하나 나무랄데가 없었다. 살짝 시큼하면서 달달한 배 술과도 잘 맞았는데 그래도 나는 와인이 나왔으면 어땠을까. 버터가 들어가면서 숯향이 가미된 생선 스테이크니 부르고뉴 빌라쥬급 샤르도네가 절로 생각이 났다. 

 

 

7번째 페어링 코스는 피닉스 나파밸리 까르베네 소비뇽 2017. 아직 영한 와인일 듯한데 예상대로 타닌이 미쳤다. 타닌이 입안을 쥐어 뜯는 느낌이고 매운 스파이시카 훅 들어온다. 그러면 또 열심히 스월링을 ^^ 

 

일행에겐 지금 마시지 말 것을 권하고, 10분 후 맛을 보는데 나파밸리 치곤 바닐라나 초콜릿, 오크번의 뉘앙스가 매우 적다. 유산발효를 하지 않았거나 해도 조금만 했을까? 타닌의 질감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하이츠셀라 나파밸리 까쇼와 흡사한 캐릭터다. 

 

매운기가 진정되자 블랙커런트, 레드커런트 등 검붉은 과실이 공존하며, 시간이 흐르면서 타닌도 동글동글해졌다. 향은 그냥 그런데 맛의 집중도는 계속 올라간 모습이 인상적.  

 

 

이것과 곁들인게 한우 안심 스테이크. 마지막 데미를 장식한 것 치곤 평범하다. 안심 스테이크란 메뉴라서 평범한게 아니라 구운 상태, 서빙 온도, 곁들인 가니시나 소스에 이렇다할 특색이나 힌트라 할 만한 게 없다. 특히 서빙 온도가 다소 아쉽고.. 고기는 좀 덜 익히면서 접시를 더 뜨겁게 해서 냈더라면.. 

 

 

후식은 수정과와 아이스크림. 그리고 사진을 찍지 못했지만 뉴욕 - 서울이란 디저트가 제공된다. 또한, 이것과 곁들일 8번째 페어링 코스가 나왔는데 와인이 아닌 달달한 리큐르였다. (디저트 와인이었으면..)

 

 

커피와 다과로 마무리. 

 

식사 시간은 2시간 40분 정도 소요. 첫 방문이라 여러가지 힌트를 느꼈지만, 메뉴가 싹 바뀌지 않은 이상 재방문 의사는 없을 것 같다. 전반적으로 개성이 뛰어나거나 창의력이 돋보이는 음식이라기 보단 무난하고 안정된 느낌이다. 몇몇 페어링 코스와 요리와의 궁합은 아쉽다. 

 

8잔의 페어링 코스에서 흔히 구성하는 강약약강약의 리듬에 너무 얽매인 것은 아닌지.. 이러한 장단은 와인을 잘 모르는 초심자들에겐 임팩트가 있을지 몰라도 자칫 요리와 마리아주에서 언밸런스가 생길 염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테이블 와인이 가지는 품질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 필요한 합이지만, 그러다 보면 지나치게 캐릭터가 센 와인을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음식과 내게 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이날 가장 좋았던 와인은 바롤로 > 돔페리뇽 > 리즐링 순이었고, 아쉬운 와인은 쥐라 마을의 샤도네이와 피닉스 나파밸리 까쇼, 후식 때 제공된 리큐르였다.

 

때문에 좋았던 음식과 아쉬운 음식이 똑같이 따라온다. 좋았던 것은 아뮤즈 부쉬, 참치 김밥, 로얄 비빔밥, 옥돔 스테이크였고, 아쉬운 디쉬는 안심 스테이크와 아스파라거스 요리(전반적으로 심심한데 와인은 강렬), 수정과 아이스크림이었다. 

 

음식 : 4.1(5점 만점)

페어링 : 3.5(5점 만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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