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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블라인드 테이스팅이 재미가 있어 종종 하고 있습니다. 다만, 저는 와인 전문가가 아닌 취미라 완전한 백지상태에서 나라와 품종을 알아맞히는 건 무리일 것으로 보고, 6지선다형으로 진행해 보았습니다.

 

위 사진은 셀러에서 나라 별로 고른 여섯 종류의 와인입니다. 왼쪽부터

 

1) 689 레드 블랜드(미국)

2) 크로즈 에르미따쥐(프랑스)

3) 카이켄 울트라 말백(아르헨티나)

4) 루피노 모두스 토스카나(이탈리아)

5) 운드라가 파운더스(칠레)

6) 투헨즈 릴리즈 가든(호주) 

 

참고로 위 와인들은 맛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나라와 품종의 전형적인 특성만을 염두에 두고 진행. 아내가 임의로 두 개를 골라 잔에 따라 놓고 병은 가린 상태에서 시음. 아내가 고른 것은 1) 카이켄 울트라 말백, 2) 운드라가 파운더스 까쇼. 

 

색은 둘 다 진한 보라색으로 비슷. 코어에서 림으로 가는 그라데이션에선 카이켄 울트라 말백의 색이 변화무쌍하고, 운드라가는 그라데이션 층이 얇음. 카이켄 말백부터 맛을 보는데 첫맛부터 구두약, 피라진 냄새가 감지 -> 칠레 와인을 의심하다가 운드라가 파운더스를 맛보는데 구두약, 피라진이 뿜뿜. 제가 싫어하는 피망과 매운 냄새까지 작렬해 곧바로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호주를 배제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블라인드 테이스팅은 프로가 아닌 저도 그리 어렵지 않게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전형적인 칠레 와인의 피라진이 두드러져 운드라가 파운더스임을 알아맞힐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맛봤던 와인 역시 은은하게 피망냄새가 나서 아르헨티나 와인임을 의심하다가 다른 나라를 차례대로 대입. 일단 호주 쉬리즈의 진득함과 풀바디감이 아니라는 점에서 쉬라즈는 곧바로 배제. 

 

미국 특유의 다이아세틸(버터향)도 감지되지 않아 미국도 배제. 프랑스 론의 에르미따쥐의 과실미도 느껴지지 않아서 배제. 결국 이탈리아의 보르도 블랜딩을 놓고 고민하다가 바디감이 쉬라즈보다 낮고, 까베르네 소비뇽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높아서 아르헨티나산 말백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두 와인 모두 알아맞추는데 성공. 사실 여섯 개의 와인들은 나라부터 품종까지 너무 다르고 상반되는 스타일이라 와인을 좀 마셔본 이들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범위를 좁혀가며 맞출 만한 쉬운 게임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든 운드라가 파운더스의 시음 후기는 아래와 같습니다. 

 

 

 

#. 운드라가 파운더스 컬렉션 까베르네 소비뇽 2017
▶ 타입 : 레드
▶ 생산국 : 칠레 > 운드라가 > 파운더스 컬렉션
▶ 품종 : 까베르네 소비뇽 100%
▶ 알코올 : 14%
▶ 구입가 : 4만원
▶ 페어링한 음식 : 수제로 만든 소고기 치즈 베이컨 버거
▶ 브리딩 : 디켄터에서 30분에서 2시간까지, 남은 것은 더블 디캔팅으로 다음날까지

- 색은 매우 진한 보라색, 림 베리에이션이 적고, 그라데이션 층이 얇아서 영하고 복합미가 적을 것으로 추정

- 뽕따 직후 느껴지는 진득한 피라진 향. 피망, 채소주스, 구두약, 역겨운 고무탄 냄새
- 풀바디에 가까우나 풀바디는 아님. 타닌이 거칠고 정돈되지 않았으며 과실미도 희미. 산도가 낮은 편.

- 1시간 디켄팅에도 타닌은 까끌까끌, 자두를 필두로 건고추의 알싸함이 과실과 미네랄리티를 가린다. 
- 디켄팅 2시간 후, 거친 타닌이 진정 국면에 들었으나 여전히 피망 주스를 마시는 기분에 매운 스파이시가 입과 혀를 얼얼하게 한다. 


※ 브리딩 노트
3시간 이상 충분한 디켄팅 또는 목브리딩으로 하루 정도 두면 특유의 구두약 냄새가 사라지고 타닌도 부드러워진다. 

※ 총평

굉장히 실망했다. 4만원대 와인에 G7에서 느껴질 법한 싸구려 구두약 냄새, 강렬한 피라진, 거친 타닌, 이날 함께 시음한 카이켄 울트라 말백(2만원대)보다 나은 구석이 하나도 없다. 알싸하고 매운 스파이시도 선을 넘었고, 산도는 제 역할을 못하니 그나마 남아 있던 과실미와 희미한 미네랄마저 느끼기 힘들다. 이쯤이면 돈 값을 못하는 와인, 다른 훌륭한 선택지가 많아 굳이 이 돈 주고 마셔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며 혹평하려 했는데... 

 

하루가 지난 후 마셔보니 웬걸? 거슬렸던 구두약과 피라진은 전부 날아간 상태. 매운 고추맛도 거의 사라지고, 타닌도 부드러워지니 이제야 자두와 라즈베리의 검붉은 과실미와 미네랄리티가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특정 빈티지의 영향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이 돈을 주고 다른 훌륭한 선택지가 많기에 재구매할 일은 없지만, 운드라스 파운더스를 보유하거나 맛볼 예정이라면, 하루 전에 코르크를 따서 다시 닫아두거나 혹은 3시간 이상 디켄팅으로 맛보길 권한다. 애초에 칠레 와인에 길들인 이들에겐 피라진(피망향)이나 구두약 향을 맡기 힘들겠지만, 구대륙 와인을 즐기다 중저가 칠레 와인을 즐기면 바로 알 수 있을 만큼 구두약 냄새가 심할 것이다. 반대로 하루가 지나도 과실의 집중도를 크게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힘으로 느껴진다. 총점은 88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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